미국은 이스라엘을 제외하고 유대인 인구가 가장 많은 곳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에 처음으로 도착한 유대인은 어디서 왔을까요? 바로 브라질에서 온 것입니다. 이 사실에 놀라시는 분들이 많을 텐데, 그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유대인을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동부와 중부 유럽에 거주했던 아슈케나지 유대인이고, 둘째는 이베리아 반도, 즉 스페인과 포르투갈,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온 세파르디 유대인입니다. 셋째는 중동 지역에 거주했던 미즈라히 유대인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럽 대륙에서 유대인들은 오랜 시간 동안 박해와 탄압을 받아왔습니다.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의 종교 재판은 그들의 삶에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박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파르디 유대인들은 두 가지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첫 번째는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으로, 이러한 유대인들을 '마라노'라고 불렀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도망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이나 네덜란드 등 다양한 곳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브라질이 등장하게 되었을까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뉴욕은 원래 '뉴 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중남미 쪽으로 진출하면서 브라질의 헬스피르라는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곳에 서인도 회사를 세웠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서인도 회사를 따라 브라질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헬스피르 지역은 포르투갈에 의해 점령당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서 고초를 겪었던 세파르디 유대인들은 다시 한 번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부분은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갔고, 그 중 일부는 뉴암스테르담, 즉 현재의 뉴욕으로 건너갔습니다. 이들을 두고 '미국 땅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세파르디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세기 이후로 세파르디 유대인들이 미국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며 큰 돈을 벌었습니다. 이들은 특히 상업과 무역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미국 경제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세파르디 유대인들은 그들의 상업적 재능을 활용하여 유럽과 미국 간의 무역을 활성화시키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의 성공적인 사업 운영은 이후 유대인 커뮤니티가 미국 사회에 통합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19세기에는 두 번째 유대인 이민 물결이 독일계 유대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1840년대에 많은 독일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이는 유럽 대륙에서 발생한 혁명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1848년에는 유럽 전역에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 혁명은 빈 체제, 즉 권위주의적 체제에 저항하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공화정을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촉발되었습니다. 1848년 1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혁명은 2월 프랑스, 3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빈 등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이 시기에 유대인들은 여전히 많은 차별과 핍박을 받았고, 혁명 정신에 동조하여 혁명에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혁명들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고,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다시 한번 신대륙인 미국으로 도망가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이때 많은 독일계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건너왔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의 창립자인 마커스 골드만도 이 시기에 독일 바바리아 지방에서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마커스 골드만은 미국에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아 성공적으로 정착하였고, 이는 후에 유대인 금융업계의 상징적인 사례로 남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시기는 러시아에서의 박해가 심화된 시점입니다.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제를 폐지한 군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암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폭력이 급증했습니다. 당시 암살 사건의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후임자인 알렉산드르 3세는 유대인들에 대한 폭행과 살해를 허용하는 칙령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은 더욱 위험에 처하게 되었고, 이들은 다시 미국으로 대거 이주하게 됩니다. 1880년대부터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 이 시기에 무려 250만 명의 유대인이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미국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기여하게 됩니다. 이들은 상업, 정치,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그들의 재능과 역량을 발휘하며, 미국 사회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이주는 단순한 이동이 아닌,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사건으로, 미국의 사회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새로운 땅을 찾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새로운 환경 속에서 재구성하며, 미국 사회의 다원성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이들은 미국 유대인 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이 시기에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20세기 초, 유럽에서의 박해와 차별을 피해 많은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이는 유대 민족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가장 큰 이주 물결 중 하나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즉 나치 정권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도망온 유대인들입니다. 이 시기에는 많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한나 아렌트, 에리히 프롬, 현대 음악의 창시자로 알려진 샴베리 코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미국 문화와 사회, 경제,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의 지식과 창의성은 미국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며, 특히 과학, 철학, 문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유대인들은 미국으로 이주할 경제적 여력이 없었고,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강제 집단 수용소에서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때때로 유대인들이 미국 사회를 움직인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이는 과장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 내 유대인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에 비해 많은 유대인들이 요직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이스라엘 정책 위원회는 매년 연례 행사와 컨퍼런스를 열며, 성인용품판매이 자리에는 많은 정치인과 경제인들이 참석합니다. 최근 몇 년간 이 행사에서는 펜스 부통령이 기조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치계에서도 많은 유대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가경제위원장을 맡았던 게리 코헨, 재무부 장관을 지낸 스티븐 므누신, 현재 국무부 장관인 앤서니 블링켄 등 많은 유대인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경제계에서도 유대인들의 영향력은 상당합니다. 현재 재무부 장관인 자넷 옐런은 물론, 전 연준 의장이었던 벤 버냉키와 같은 인물들도 유대인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은 미국의 경제 정책과 금융 시스템에 큰 영향을 미치며, 그들의 전문성과 경험은 미국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결국, 미국 내 유대인들은 그들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 그리고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을 통해 미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정치 성향은 일반적으로 민주당 지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화당을 지지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실제로는 유대인들이 민주당에 더 많은 지지를 보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배경을 살펴보면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소수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이나 차별에 대한 민감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그들이 보다 진보적이거나 왼쪽 성향의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이들이 미국으로 이주할 때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게 된 경우도 많았으며, 이는 민주당의 진보적 정책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모든 지역의 유대인들이 동일한 정치 성향을 보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중도 성향을 가지는 반면, 호주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더 보수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지역적 배경이 정치적 성향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케네스 왼트 교수는 유대인들이 처음부터 민주당을 지지한 것은 아니라고 언급하며, 1928년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정치 성향이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합니다. 당시 민주당의 대선 후보인 알 스미스는 아일랜드계 카톨릭 출신으로,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 사회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유대인들은 기득권 세력인 개신교 미국인들보다 스미스에게 더 큰 애착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민주당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습니다. 1920년대는 금주법이 시행된 시기였습니다. 이 금주법은 이민자들을 겨냥한 법률로, 주로 백인 프로테스탄트 집단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공화당은 금주법을 지지했으며, 이는 유대인들에게 반 이민 정서를 상징하는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금주법에 반대하는 민주당을 지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맥락 속에서 유대인들은 민주당을 지지하게 되었고,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대인 커뮤니티는 민주당의 진보적 가치와 사회적 정의를 중시하는 정책에 공감하며, 이를 통해 자신들의 역사적 경험과 연관된 정치적 입장을 형성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지지는 미국 사회 내에서 유대인들의 정체성과 문화적 유산을 더욱 강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특히 1928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인 알 스미스에 대한 비방과 흑색선전이 극심했던 점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스미스는 카톨릭 신자로, 당시 미국 사회에서 카톨릭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존재했습니다. 이로 인해 "카톨릭이 워싱턴 D.C.와 백악관을 침공할 것"이라는 공포가 퍼졌고, 유대인들은 그 상황을 보며 자신들에게도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럽 대륙에서 심각한 차별과 탄압을 피해 도망온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정서는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정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에도 이어졌습니다. 당시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은 사회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은 사회 복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유대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이로 인해 민주당에 대한 애착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또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다양한 사회 집단을 포괄하는 '뉴 딜 연합'을 형성하여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온 노동자들, 유색인종, 카톨릭, 그리고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대인들의 민주당 지지 성향이 조금 느슨해지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등장한 네오콘(Neocon) 운동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주목을 받았고, 어빙 크리스톨과 같은 인물들이 이 운동의 중심 인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유대인들이 민주당 쪽으로 결집하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공화당이 보수적인 카톨릭과 남부의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을 지지 세력으로 편입시키면서, 유대인들은 다시 민주당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강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보수적인 가치관이 유대인들에게는 불안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이 가진 신념과 유대인들이 지향하는 사회적 정의와 평등의 가치가 충돌하면서, 유대인들은 민주당의 진보적 가치에 더욱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은 민주당의 정책과 가치에 공감하며, 그들의 정치적 지지를 이어오게 됩니다. 이러한 정치적 연대는 미국 사회 내에서 유대인들의 정체성과 문화적 유산을 더욱 강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민주당의 진보적 가치와 사회적 정의를 중요시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역사적 경험과 연결된 정치적 입장을 형성해 나가고 있습니다.